부마항쟁 후 박정희대통령 암살사건 후 내려진 계엄령선포
1979년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한 해로, 부마항쟁과 10·26 사태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부마항쟁은 유신 체제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으로 이어지며 대한민국의 정치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1. 부마항쟁의 배경과 전개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현 창원시)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입니다. 유신체제의 억압적 정치, 언론 탄압,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시민과 학생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야당인 신민당의 김영삼 대표 제명이 도화선이 되어,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강경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와 체포자가 발생했습니다.
2. 10·26 사태와 계엄령 확대
부마항쟁이 끝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붕괴하고,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이후 정부는 치안 유지를 이유로 전국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였습니다.
계엄령 확대 조치:
박정희 사망 직후인 10월 27일, 기존 부산·마산 지역에 국한되었던 비상계엄령이 서울을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군부는 정국의 혼란을 틈타 정치 개입을 강화했으며, 이는 이후 12·12 군사반란과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집권
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계엄 하에서 군사법원이 설치되고, 언론 검열 및 집회·결사의 자유가 철저히 제한되었습니다.
3. 계엄령의 영향
전국적으로 선포된 계엄령은 민주화 운동 세력을 철저히 탄압하고 군사정권의 권력 강화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는 곧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습니다.
부마항쟁과 10·26 사태, 그리고 계엄령 확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길에 중요한 사건이자 유신체제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동시에 이 시기는 신군부의 등장과 이후 독재 강화로 이어지며 대한민국의 정치적 혼란과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